종친회(宗親會)

풍천임씨

태양사 2013. 2. 24. 17:20

 

풍천임씨

[ 豊川任氏 ]

본관소재지 : 황해도 송화군 (黃海道 松禾郡 )

시조명 : 임온(任溫)

본관연혁

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 시대는 구을현(仇乙縣) 또는

굴천(屈遷)이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굴현현(屈峴縣)으로 개칭하고,

양악군(楊岳郡: 安岳)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에 풍주(豊州)로 이름을 바꾸고,

995년(성종 14) 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1018년(현종 9) 군으로 강등되고

방어사(防御使)가 설치되었다. 1395년(태조 6) 진(鎭)이 설치되었고 병마사(兵馬使)가

지주사(知州使)를 겸했으며,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 때 은율(殷栗)을 합병하여

풍율군(豊栗郡)이라 하였다가 곧 분리하였다. 1469년(예종 1)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풍천도호부(豊川都護府)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풍천군이 되어 해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황해도 풍천군이 되었다. 1909년 풍천군을 폐지하여 송화군(松禾郡)에

합병했으나, 1967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대부분의 옛 풍천도호부 지역이

과일군으로 분리 개편되었다.

 

 

 

성씨의 역사

시조 임온(任溫)은 중국 소흥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에서 고려로 건너와 정착해

시원을 이루었고, 6세손 임주(任澍)에 이르기까지 황해도 풍천(豊川)에서 살게 되면서

풍천임씨가 비롯되었다고 전해지나 후손들은 선대가 중국인이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임도(任徒)· 임천유(任天裕)의 비석과 지석에는 임주의 세계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고 경주 불국사에 소장된 《경상도선생안(慶尙道先生案)》에도

그 선조가 중국에서 왔다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문이 드는 것이다.

임주는 충렬왕대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 조봉대부(朝奉大夫),

감문위대장군(監門衛大將軍)을 지내는 등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분적종 및 분파

임주의 아들 임자송(任子松)과 임자순(任子順)을 파조로 각각

백파(伯派)와 중파(仲派)로

나뉘었다.

 

주요세거지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내대리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상사리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대위리

강원도 평강군 남면 정연리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운산리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근전리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봉성리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풍천임씨는 5,722가구 총 17,971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2011년 본관과 성씨별 인구수 통계표를 보면

333개의 본관과 성씨 중 82위로 99,986명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2000년

통계는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유명 인물

임주의 아들대에서 충숙왕 때 삼사판사(三司判事) 자송(子松)과 민부전서(民部典書)

자순(子順)의 두 갈래로 크게 나뉜다. 자송의 5대손으로 세종 때 우찬성 원준(元濬)은

세종∼성종대의 총신이며 학자였는데 아들 사홍(士洪)이 중종반정으로 치죄되면서

관작이 추탈되었다.사홍은 아들 광재(光載)가 예종의 사위, 숭재(崇載)가 성종의

사위가 되면서 정권의 중추에 등장하여 권신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게 하여 중종반정 때 피살되었다.

또, 숭재의 아우 희재(熙載)는 성종 때 직제학을 지냈는데 아버지, 형과는 달리 연산군

비방하여 갑자사화 때 화를 입었다. 그 뒤 자송의 7대손으로 명종 때 한성판윤·제학을

지낸 열(說)의 후손과 자순의 6대손으로 중종 때 한성판윤·공조판서를 역임한 유겸(由謙)과

감찰 유손(由遜) 형제의 후손이 번창하여 풍천임씨의 2대 인맥을 이룬다. 열의 후손에서는

고종 때 우의정 백경(百經), 학자 성주(聖周),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국로(國老),

현종 때 병조참판이며 명신으로 이름난 유후(有後)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유겸의 후손에서는 중종 때 예조참판 추(樞), 역시 중종 때 병조·예조 판서

권(權)과 추의 아들로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호신(虎臣),

형조참의를 지내고 역시 청백리에 오른 보신(輔臣) 등이 대를 이어 청직(淸直)으로

유명하였다.유손의 후손에서는 남원부사 현(鉉), 숙종 때 형조참판 홍망(弘望), 정조 때의

학자 태춘(泰春), 헌종 때 형조판서 성고(聖皐), 고종 때 훈련대장 태영(泰瑛),

철종 때 성리학의 대가 헌회(憲晦) 등이 나왔다. 사명당(泗溟堂) 유정(惟政:松雲大師)도

풍천임씨이며,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1604년 일본에 건너가 전란중

포로가 된 3,500명의 조선인을 구출해 오기도 하였다. 2000년 통계청의 결과에

의하면 5,722가구 총 17,97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참조항목

유정, 임국로, 임권, 임백경, 임사홍, 임성고, 임성주, 임열, 임원준, 임유겸,

임유후, 임자송, 임추, 임헌회, 임현, 임호신

역참조항목

임장, 임효달, 임영로

[출처] 풍천임씨 | 두산백과

 

 

 

 

 

참고: 장흥임씨

시조는 고려 때 상서공부원외랑을 지낸 임호(任顥)이다. 그이 아들 의(懿)는

예종 검교태보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를 지냈고 인종 때에는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의의 아들 원후(元厚)는 인종비(仁宗妃) 공예태후(恭睿太后)의 아버지로

 의종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 그의 아들 극정(克正)·유(濡:초명 克仁)·극충(克忠)·부(溥),

그리고 유의 아들 경순(景恂)·경숙(景肅)·경겸(景謙) 등이 고려시대에서 정3품 이상의

벼슬을 지내고 학자와 명신(名臣)으로 유명하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7,652가구에

 2만 45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참조항목

임원후, 임유, 임의

[출처] 장흥임씨 | 두산백과

(2013년 2월 24일 수암 임 문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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