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리나라 예절의 변천
우리나라 예절의 역사적 변천
우리나라의 예절은 단군건국에서부터 엄격히 정해졌고, 중국이
생활문화 윤리와 도덕, 효도하는 법을 우리나라에서 배워 갔으며,
우리 조상들이 서로 사양하고 남녀의 구별이 있어 '예절의 나라'라
일컬어졌을 뿐아니라 동양의 성인(聖人) 공자가 우리나라에서
살고 싶어 했다.
혼인윤리(婚姻倫理)만 보더라도 1147년에 이미 5촌까지의 혼인을
금했고, 1308년에는 성이 다르더라도 4촌이내면 혼인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가 조선에 들어와서는 동성동본(同姓同本)간의 혼인을 금지
하였다. 586년, 신라 진평왕 8년에 이미 예절을 관장하는 예부를
두었으며, 1475년, 조선 성종6년에는 나라의 예절을 정하는
국조오례의를 펴냈다.
특히 우리나라의 예절을 바르게 세워 겨례의 스승(東國 18賢)이 되신
예학(禮學)의 종장(宗長) 사계 김장생선생은 상례비요와 가례즙람을
지으면서 "모든 예문이 주자가례에 자상하게 실려 있으나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달라서 현실에 맞지 않는 것도 있는데 선비들이
변통(變通)하는 요령이 없으니 병폐다. 그러므로 전해지는 우리의
풍속과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참작해 실용하기에 편하게 했다."고
말해 우리 예절은 우리 고유문화임을 규정했다.
이어서 기본예절의 응용방법을 다룬 가례증해와 가정의레의 절차만을
간추린 사레편람이 뒤를 이어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바르게 세워진 우리의 예절은 거의 모두가 한문자로
쓰여젔기 때문에 한문공부를 할 수 있었던 지배계층에서만 행해 졌던
것이 사실이다.
1894년 6월에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면서 대중화가
이루어지더니, 1910년에 국권(國權)을 상실하면서 일본(日本)의 생활
문화가 침투해 범람했고, 1945년 조국은 광복되었으나 서구(西歐)문화가
밀고 들어와 우리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인 예절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성균관(成均館)과 향교(鄕校)를 주축으로 하는 전국의 유림(儒林)이
중심이 되어 우리 예절의 재건과 실천을 위해 충효(忠孝) 교실을 설치해
지도하고 있으나 큰 성과가 있으려면 더욱 노력을 해야된다.
우리는 다시 예의한국을 재건하여 예의 국민으로서 보람을 누려야 한다.
2011年 7月 12日 邃 菴 任 文 鎬 (출처;성균관유도회 경기도 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