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천임씨 17世 금시당 임의백(任義伯)
領議政 李宣顯撰
平安道觀察使任公神道碑 銘
자는 계방(季方), 호를 만한(晩閑) 또는 금시당(今是堂)이라 하였다. 좌 승지 연(兖)의 아들이요, 한성판윤(漢城判尹) 죽애(竹崖) 열(說)에 증손이다. 어머니는 초계 정씨(草溪鄭 氏), 진사(進士) 유성(惟誠)의 딸이며 대사헌(大司憲) 수몽(守夢) .曄)의 누님이시다.
그 둘째 아들로 태어나니 첨 정(僉 正) 준백(俊伯)은 그의 형이다. 1605(선조38)년 10월 초2일에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이 아이를 낳기 전에 내 이상한 꿈을 얻어 귀한 아들을 둘 것을 임 알았는데 이 아이의 골상(骨相)이 매우 기이(奇異)하니 다만 우리문호만을 일으킬 뿐 아니라 마땅히 국가의 주석(柱石)이 될 것이다” 하고 유명(乳名)을 주 국(柱 國)이라 했다. 6세에 아버지 무릎 위에 안겨 소시(小詩)의 연구(聯句)를 반아 읽고 있었는데 마침 친척의 손이 왔다가 이를 보고 구름과 달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네가 연구를 읽는다고 들었는데 네 능히 이 광경을 시구(詩句)로 지을 수 있겠느냐” 하니 공이 대답해 말하기를, “운무 족 행 천리(雲無足行千里), 월 신소 조 만가(月身小照萬家)”라 했다. 즉 [구름은 발이 없건만 천리를 가고, 달은 몸이 적어도 만호의 집을 비친다]는 말이다.
손이 이를 듣고 깜작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아버지가 그 서 매부(庶 妹夫) 박치의(朴 致毅)의 역모(逆謀)로 인해 체포되어 가니 온 집안이 황황 하여 공부를 폐지했다가 석방된 뒤에 11세에 다시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다가 아버지를 잃고는 외삼촌 수몽(守몽) 정엽(鄭엽)에게로 가서 거기서 자라면서 배웠고, 수모의 명으로 다시 멀리 연산(連山)으로 가서 당세의 유종(儒宗)이었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수업을 청하여 가례(家禮). 성리(性理) 등의 서적을 배우니 가계에 큰 기허(期許)를 받으며, 문하(門下)의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김익희(金瀷熙). 조한영(曺漢英) 등과 서로 면려하며 깊은 교계(交契)를 맺었다.
1630(인조8)년 26세에 진사 시(進士 試)에 합격하고, 이태 후에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청(淸)나라의 대균이 돌입해오니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가고, 왕자(王子)를 비롯해서 사대부(士大夫)의 가족들은 모두 천험(天險)의 요새(要塞)인 강도(江都)로 피난 갔는데, 공은 청나라 진중에 명(明)나라의 항장(降將)이 있어 능히 수군(水軍)을 쓸 것이므로 아무리 천험 이라 해도 족히 믿을 것이 못될 뿐 아니라 지키고 있는 장수들이 장재(將才)가 아니어서 통솔력이 없고 명령계통이 서지 않아서 바로 패할 것으로 단정하고 형제자매를 데리고 서산(瑞山)의 해변으로 가서 온전히 난을 피했다. 이듬해 호란이 종식되고 제 용감 참봉(濟用監參奉) 에 임명되고 이듬해 봉사(奉事)로 전직, 인조(仁祖)가 장렬왕후(莊烈王后)를 맞아드릴 때 가례도감 낭정(嘉禮都監郎㕔)을 거쳐 좌 수운 판관(坐 水運判官)이 되어 조운(漕運)의 간편을 꾀하고 숙폐(宿弊)를 덜어 조졸(漕卒)들이 비석을 세워 업적을 칭송하니 수운(水運)에 비가 세워진 것은 전대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다시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거친 뒤에, 1643(인조21)년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나가서는 덕화(德化)를 위주로 하고 위 형(威 刑)을 피하였으며 푸 옥의 우매하고 비루함을 통탄하고 교화에 힘써 재임 6년에 볼만한 치적이 많아 군민들은 동비(銅碑)를 세워 이를 칭송했다.
1649(인조27)년에 순창군수(淳昌郡守)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문과별시(文科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 직 강(成均館直講)이 되었다. 효종(孝宗)이 왕위에 오르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어 은총을 받고 있던 김자점(金자點)의 죄를 論啓)하여 죄률을 가중시켜 섬으로 귀양 보낼 것을 주장했고, 이조판서(吏曹判書) 심액(沈詻). 정랑(正郞)) 엄정구(嚴鼎耉)의 정실추천 및 이를 비호(庇護)한 사간(司諫) 심대부(深大孚) 의 죄를 논박하였으며 이듬해에 헌납(獻納)으로 옮겨서는 더욱 말을 기피하지 않았는데 이때 홍문록(弘文錄)이 있는데 공이 본관(本館홍문관(弘文館)에선 피선되었으나 당시 재상 중에 공을 질시하는 자가 있어 필경 도당록(都堂錄)에서 말살되고 마니 공론이 이를 애석해 하였다.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이 되어 충청도의 감사(監試)를 관장하고 돌아와 당시 장령(掌令)에 임명, 광해 조(光海 朝)에 일찍이 단독으로 소(疏)를 올려 폐모론(廢母論)을 제기하고도 죄망(罪網)에서 누락된 자의 처형을 누차 청하였고, 왕자(王子) 인흥군(仁興君)의 범법한 사실이 탄로되어 공안(公案)이 이미 이루어진 것을 말하지 말라는 임금의 준엄한 분부가 있자 다시 이의 징계를 청하였다가 격뇌(激惱)된 어조의 비지(批旨)를 받고 장문(長文)의 피사(避辭)를 올려 이에 항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직언 극간(直言極諫)하니 공의 직성(直聲)이 크게 떨친 일면, 임금의 노여움도 또한 오래도록 풀리지 않았다.
무인(武人) 변사기(邊士紀)가 수원부사(水原府使)가 되어 갖은 횡포를 자행하며 직무를 유기하고 있어 감사(監司) 김광욱(金光煜)이 수령들의 치적보고를 통해 책임을 시도하였던 바, 정승 이시백(李時白)의 탄핵으로 연유하여 임금은 도리어 감사를 파직 시키고 변사기를 유임 하는 처분이 내렸다. 이에 공이 대사헌(大司憲) 홍무적(洪武績)과 더불어 계사(啓辭)를 올려 논쟁하기를, “정당한 감사의 전 최(殿 最)를 일개 수령을 비방해 하고(下考)에 두었다 해서 선뜻 감사를 파한다면 기강이 너무 무너져 법령이 시해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사기는 본시 김자점(金自點)의 그늘 밑에서 자라난 자로서 직무를 전폐하고 우양(牛羊)을 도살하고 술을 빚어 날마다 부하 장교들과 음주를 일삼고 있어 그 행위가 해고할 뿐더러 그 심중을 알 길이 없으며, 천재시변(天災時變)을 당하여 상하가 우황(憂遑)중에 잇는 이때, 이와 같은 무식한 무부(武夫)를 서울과 가까운 군사적 중진(重鎭)에 둔다는 것은 부의(浮議)만을 빚어낼 뿐 아니라, 식자들의 우려마저 없지 않다”고 설파하고 심지어 구양수(歐陽脩)가 적청(狄靑)의 일을 인용해 입증하며 변사기의 파직을 강력히 청했다. 그러나 임금은 이를 쫓지 않고, 대신이 낸 차자(箚子) 비답(批答)에 “임금과 대신도 또한 어떻게 조판(措辦)할 수 없게 되겠다”고 말하여 공은 다시 피사(避辭)에서 “대간(臺諫)의 언론이 비록 과격하더라도 공(公)에서 나왔다면 대신도 이를 너그럽게 받아드려 화평한 마음으로 합심 협력해서 당면한 난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고 했다. 임금이 이에 대하여 엄준한 비답을 내려 꾸짖고, 또 그 말이 대신에게 저촉되었다 하여 사양하지 말고 물러가 처지를 가리리라는 상례(常例)를 깨고 즉시 직위를 해제 시켰다.
1651(효종2)년에 청나라의 사신이 끊임없이 잇달아 왔는데, 안주(安州)가 잔폐(殘廢)하여 사신의 지대(支待)를 제대로 하지 못해 판관(判官)이 청나라 통역(通譯)들의 호통에 배겨나지 못하고 달아나곤 했다. 감사의 보고로 임금은 판관을 극선(極選)하란 명을 내리고 드디어 공을 임명했다. 그러나 수개월이 못되어 임금은 앞서 왕자를 율문에 의해 처벌하라는 계사에 다시 격로하여 특명으로 공의 직위가 삭탈(削奪)되고 말았다. 그러나 안주 읍민들은 비를 세우고 삼월위정(三月爲政) 만세불망(萬世不忘)이란 문구를 새겨 기념했다. 얼마 안되어 다시 서용, 외임(外任)을 빌어 영천군수(永川郡守)가 되어 나갔다. 이해 김자점의 역모(逆謀)가 발각되고 변사기는 그의 일당으로 임금의 친국(親鞠)아래 수원의 군병을 인솔하고 며칠 날을 기하여 궁궐을 침범하겠다는 약속을 관직이 갈리므로 인해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승복하고 도 임금에게 부도(不道)한 말을 해서 모두 저자에 내다가 찢어 죽이고는 수일 후에 임금이 연석(筵席)에서 탄복해 말하기를, “지난번에 변사기가 그 흉 모를 성취하여 군사를 일으켜 왔다면 홍무적과 임 아무개는 맨 먼저 어육(魚肉)이 되었을 것이다”하고, 선견지명(先見之明)을 포장, 홍무적은 특히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하고 공은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제수하니 영천으로 부임한지 겨우 13일만이었다. 영천인사 수백 명이 연명해 글을 올려 유임을 청했으나, 조정에서 은명(恩命)의 발탁이라 어쩔 수 없다고 회보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이때 사간원(司諫院)에서 연성군(延城君) 이시방(李時昉)이 김자점을 비호했다 해서 중하게 탄핵하고 그의 귀양을 청하였으니 이는 김자점과 연인(連姻)관계가 있는 까닭이다. 공이 말하기를 “이 집이 본래 충성 있고 근신한 것으로 이름이 있는 터 인데 혼인 관계로 해서 지나치게 의심하는 것은 부당하다’하고, 그 계사(啓辭)를 정지시켰다. 이시방은 앞서 변사기의 일로 공과 힐난이 있었던 정승 이시백의 아우였으므로 사람들이 공의 공정한 마음가짐에 탄복했다. 이어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시강원 보덕(侍 講院輔德).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意)를 역임하였는데 이해 겨울에 동래(東萊)의 관 왜(館 倭) 백여 명이 칼을 빼 들고 주성(州城)으로 격돌해온 사건이 발생하여 부사(府使)가 파면되고, 정승 정태화(鄭太和)의 추천으로 동래부사가 되어 내려갔다. 설관약조(設關約條)와 개시절목(開市節目)이 모두 없어져서 저희들의 야만적 횡포를 규제할 법적 근거가 없음을 우려하여 모든 사정을 검토하여 7개항의 금조(禁條)를 제정하여 묘당(廟堂)의 인준을 거쳐 판자(板子)에 새겨 동래 부(東萊 府)와 부산진(釜山鎭) 공청에 게시하여 영구히 준행토록 했고, 이듬해에 대마도(對馬島)의 왜인이 사람을 보내어 권현당(權現堂)의 향(香)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다. 권현당은 일본의 관백(關白) 덕천가강(德川家康)의 원당(願堂)으로서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사설한 것인데, 그 말이 관 백을 빙자해서 교활한 수범으로 공갈하려는 의사가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데 저희들과 어떤 쟁단(爭端)이 있을 경우, 왜인의 성질이 거칠고 조급한 탓으로 흔히 칼을 빼 들고 위협하는 변이 있었다. 공이 먼저 말하기를, “나와 네가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사이다. 그러므로 다만 그 가부만 논할 뿐이지 사적 감정이 그 사이에 작용 해서는 아니 되니 만치, 말이 비록 서로 맞지 않더라도 폭로(暴露) 실경(失敬)하는 격 망한 행동은 하지 말라”하니 왜의 사자는 “삼가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었다. 공은 드디어 그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에서 지키는 것은 예(禮)뿐이다. 나는 고금 천하를 통하여 나라에는 종묘(宗廟)가 있어 선왕(先王)을 제 향 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신하가 그 군주(君主)를 사사로이 제사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은 즉, 이를 이웃 나라에 알게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본다. 내 비록 이를 금하지는 못하겠으나 예의에 합당치 않은 일을 어찌 돕겠는가? 또 해마다 보내는 선박의 수효가 많아서 명목 없는 별정선(別定船)을 우리 조정에서 오랫동안 이를 삭감하려고 검토해 왔으나 원인(遠人)을 회유(懷柔)하는 도리로 아직 그댈 내려오고 있는 터인데 내가 거기에다가 다시 더해 청하는 것은 망언(妄言)이다. 내가 어떻게 이를 보고 하겠는가”하니 도 왜(島 倭)의 사자는 예가 아니라는 말에 꿀려서 전임 부사와의 약속이 이미 되어있었는데도 끝내 말을 쾌히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불평하는 기색도 나타내지 못하고 말았다. 기타 왜인이 받쳐오는 동납(銅납)의 포탈의 독징(督徵), 館 倭)와 우리 상역(商譯)과의 상호 가대(假貸)의 금지, 관외의 접우(接遇)의 개선 등을 단행하는 등 한결같이 법도 있게 제재를 가하니, 왜인이 두려워하고 또 심복하여 감히 망동하디 않았다. 그러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와 곧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어 연석(宴席)에서 임금으로부터 변방에 대한 물음을 받고 왜인의 동정과 변방의 방위의 허술한 실태 등을 상세히 대답하고 그 시설 책을 전달하니 임금님은 글로 써서 올리라고 명했다. 공이 물러와 8개조의 달하는 편이한 조건들을 써서 올리니 모두가 절실하고 합리 한 것이라서 임금이 이를 좋은 건의라고 칭찬하며 받아들이고, 이조판서(吏曹判書) 정유성(鄭維城)과 병조판서(兵曹判書) 원두표(元斗杓)의 찬동으로 간첩(間諜)의 한 조항부터 우선 비국(備局) 으로 하여금 동래 부에 비밀리 이를 지령해서 수색 탐문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그러나 난점이 있다는 또 다른 이의가 있어 절반은 시행되고 나머지는 쓰이지 못하고 말았다.
다시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 그 하직에 임하여 임금이 사대(賜對)에서 해방(海防)의 만전한 설비, 성지(城地)의 새로운 수축 등 광범한 방위 문제를 장시간 수작하였는데, 이는 강국이 이웃에 있어 항상 국방이 문제돼 있었고,
또 효종이 북벌(北伐)의 큰 뜻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몹시 귀를 기울여 들었고, 허다한 비밀설화가 오가는 가운데 날이 늦어서야 파했던 것이다. 공이 드디어 한 도(道)의 이해(利害)를 깊이 연구하고 다시 면밀한 검토를 가하여 올리니, 무릇 8조항으로 이천삼백 여자에 달하는 장서였는데 민생문제와 아울러 군사(軍事)에 관한 섬세한 계획이어서 임금의 격찬을 받았으나 묘당(廟堂)의 논의가 일치하지 못하여 채택되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부임한지 겨우 1년 남짓한 도안에 묵고 쌓인 폐단들이 씻은 듯 제거되고 선정의 명성이 높아 평안도 관찰사로 승임 발령이 내렸다. 그러나 때마침 중앙관서의 노비(奴婢)의 추 쇄(推 刷)사무의 미완결로 도감(都監)에서 다시 유임을 계청(啓請)하였다.
1656(효종7)년에 승지(承旨)로 들어와 어느 날 등대(等對)에서 황해도의 민폐를 묻는 임금에게 적폐(積弊)가 되고 있는 몇 가지와 봉산(鳳山)군민의 세금은 마땅히 미포(米布)로 수납해야 한다는 실정을 말하니, 임금이 즉석에서 그 시행을 명하고 맡은 장관에게 묻지도 않았으니 그 신임도는 이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청나라로 사명을 띠고 갔을 때 일행중의 몇 사람이 금법을 무릅쓰고 유황(硫黃)을 무역해 온 자가 있었는데 그 사실이 탄로되어 이를 조사하려고 사신이 나오게 되었고, 공은 다시 특지(特旨)로 형조 참의(刑曹 參議)에 제수되었다. 임금은 혹시 그 누(累)가 대군(大君)에게 미치지나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날마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 및 형조(刑曹)의 관원을 불러 대책을 강구했다. 대신 이하 모두가 그 사용처를 물을 것으로 추정하고 이를 근심하고 있었는데 유독 공이 말하기를, “신은 아마도 그 출처 만을 묻고 사용처는 묻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하였다가 어느 대신에게 질책(叱責)을 당했다. 그래도 공이 이를 재삼 말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일리가 있으니 미리 그 출처를 물어 상세히 핵실(核實)하여 대기하고 있도록 하라”했다. 그리고 나서 청나라 사신이 온 뒤에 임금이 친히 관소(館所)로 가서 그 사신과 더불어 대사(對査)를 행한 결과, 사신은 과연 어디서 산 것과 판 사람이 누구인 것만을 묻고 끝내 용처에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때 공도 형조의 한 관원으로 이 대사에 참여 하였는데 임금은 중간에 여러 번 공을 주시하고 밝은 표정으로 격려했다. 대개 저희들의 조사하러 온 본의가 판자를 잡아 다스리려는데 있었기 때문에 사용처 같은 것은 물으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듬해에 동래(東萊)의 왜인들이 전일의 약조와 위배되는 말을 함으로서 사단이 벌어져 묘당(廟堂)에서 “전임 동래부사로서 변방 사정에 전통한 자를 감사(監司)로 선택해 보내자”는 건의에 따라 공을 경상도 관찰사(觀察使)에 임명, 이를 진압하게 했다. 공이 부임하자 먼저 실언(失言)한 역관(譯官)의 죄부터 다스리고는 일면 왜인의 사자를 견제하고, 일면으론 묘당의 갈팡질팡 내리는 지령에 흔들리지 않고 끝내 왜인의 법식을 어긴 글과 유황(硫黃)을 받지 않고는 수개월을 그대로 버티다가 대마도주가 죽고 다시 어찌할 길이 없어, “동래부사로 하여금 표(標)를 써주고 우선 유황(硫黃)만을 받고서 사자와 함께 서계(書契)를 도로 돌려보내어 국가의 체통을 지키고 권위를 높이자”고 건의하여 조정에서 이를 따름으로서 일단 무사히 매듭지었다. 이때 가뭄이 계속되어 임금이 각도에 전교(傳敎)를 내려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물었다. 공이 22개 조항에 달하는 폐단을 상세히 전달하고 조항마다 구제책을 제시하였던 바, 묘당 복계(廟堂覆啓)에서 거의 다 찬동을 얻어 이를 차례로 개혁하여 백성들이 크게 열복(悅服)했고, 감영(監營)의 아병(牙兵)이 기. 보(騎步)를 합쳐 거의 7천을 헤아리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교련을 폐지하고 시 탄(柴 炭)이나 징수해 쓰고, 사역(使役)에나 충당할 뿐이었다. 공이 그 그릇된 관례를 타파하고 전 병사(前 兵使) 노정(盧錠)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규정을 제정하여 기예(技藝)를 연습하고 행오(行伍)를 편성하니 얼마 안되어 모두가 정 병으로 변하였다. 이리하여 무예를 시험하여 상전(賞典을 베풀어 속오군(束伍軍)과 일체로 행할 것을 건의했으나 묘당에서 듣지 않아 영문(營門) 자체에서 이를 시험하여 우수한 자에게 후한 상전을 베풀어 격려 권장 하매, 온 사졸(士卒)이 고무했다.
이듬해 병으로 해임(解任)을 청원, 두 번 소를 올려 윤허(允許)를 얻고 서울로 돌아와 연이어 호조 참의(戶曹 參議)와 병조의 첨지(僉知).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 이 대 효종이 와신상담(臥薪嘗膽), 설한(雪恨)의 대의(大義)를 속에 품고 하루빨리 북진하려는 생각이 간절하여 진재(眞才)를 얻으려고 부심하고 있었는데,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있으면서 묘당과 협의하여 새로운 장재(將재)를 물색, 드디어 유장*儒將)으로 추천 받아 1659(효종10)년에 북병사(北兵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부임하기 전에 여질(麗質)에 감염, 병조에서 경질을 청하니 임금이 크게 놀라서 어의(御醫)를 보내어 약품을 가지고 와서 수시로 진찰 간호케 하고, 또 병세의 차도여부를 정원(政院)에 묻는가 하면 또 따로 액정인(掖政人 궁중의 하인)을 보내어 이웃사람에게 두 번 이나 물어 왔었다. 공이 특별한 은우(恩遇)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뒷날의 보답을 다짐했으나, 병이 거의 차도를 보일 무렵 갑자기 효종이 승하(昇遐)하고 말았다.
현종(顯宗)이 즉위하고 다시 형조 참의(刑曹 參議)에 임명되어 밀려 내려온 수백 건의 송사(訟事)를 판서(判書) 이완(李浣)과 더불어 서로 문안(文案)을 열람하며 각각 시비를 정해 두 사람의 판단이 일치된 것은 물론 그대로 처결하고, 혹 견해의 차이가 있는 것이 있으면 귀일(歸一)하도록 강구, 반드시 득중(得中)을 기하여 공명한 판단을 내렸다는 찬사가 많았는데, 무릇 어느 조(曹)를 막론하고 그 조의 장관이 독단해 주관하고 보좌관을 둔 것은 하여금 논의에 참여하여 같이 결단케 하기 위한 것인데 만약 장관에게 일임하고 남의 일처럼 말하지 않는다면 이 관직을 두어 무었하겠는가”하고 참여하였으며, 혹시 착오가 있을 경우 반드시 이를 지적하고, 또 의견을 개진하여 저당한 귀결로 이끌었다.
1660(현종1)년 여름에 수원부사(水原府使)에 임명되고 겨울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승진, 더욱 도정(道政)의 쇄신에 유의, 서도(西道)의 민속(民俗)이 황잡하고 사나워서 덕화만으로는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먼저 엄중한 정책을 쓰고 뒤에 은혜를 베푸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촉(蜀)나라를 다스리던 법을 썼다.
이듬해 서울에 큰 기근(饑饉)을 만나 종정으로부터 관서 미(關西 美) 8만4천 석을 선운(船運)해 올리라는 명이 내렸다. 관서지방의 미곡을 선편으로 운반한 사레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서 모두들 이를 우려하였다. 공이 변장(邊將)5명을 택정하여 각기 30여 척의 선박을 영속하게 하고 운행규제(運行規制)를 써 주었는데 조리 있고 질서 있어 마치 군령(軍令)처럼 엄했고, 해로(海路)중 가장 위험한 곳으로 알려진 세 곳에는 그 지방의 변장과 수령으로 하여금 경괘한선척을 영솔하고 나와 길을 인도하여 호송케 하도록 계청 하여 과연 1척의 침몰 사고도 없이 무사히 이를 완료하였다.
앞서 강계(江界)의 인민들이 몰래 월경해 삼(參)을 캐다가 청인(淸人)과 격투, 그들을 살해하고 돌아온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어 조정에서 그 월경한 자를 국경 위에 군중이 보는 가운데 목 베어 보이고, 또 저쪽에 자문(咨文)을 보내는 것을 공이 묘당(廟堂)에 말하기를 이 사건은 저쪽에서 당연히 먼저 힐문해 올 일인데도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는 것은 반드시 그 지방관이 보고하지 않은 까닥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먼저 고발한다면 저쪽에서 필연코 보고하지 않은 죄를 다스려 연강(沿江)일대의 경비(警備)는 더욱 강화될 것이요, 우리가 비록 계속 죄인의 효시(梟示 죄인의 목을 베었다는 것)를 단행한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인민이 다시 범월(犯越)하지 않을 것을 누가 보장 하겠는가? 내가 보기로는 양국의 경계선상이 이로 연유해서 일이 많아질 것이고 따라서 저쪽 가책(呵責)이 꼬리를 물고 올 것이 분명한즉 아무래도 좋은 계책이 될 수 없을 것으로 본다”하였으나 묘당에서 이를 받아 들이지 않은 일이 있었다. 공이 부임해 오니 과연 저쪽에서 갑군(甲軍)을 많이 동원하여 강변일 때를 순시 하면서 수시로 건너와 우리 민간인에게 음식을 강요해 먹고 또 진보(鎭堡) 및 주군(主郡)에 양곡을 요구하는 등 적지 않은 침해가 있었다. 공이 서면으로 묘당과 협의하고,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하여금 의주사람 중에서 담약(膽略)있고 청어(淸語)에 능통한 자를 택하여 은밀히 봉황성장(鳳凰城將)에게 이 사실을 통고하여 감시를 늦추게 하는 일면, 그들에게 뇌물을 써서 갑군을 거동케 하여 서북변경이 점차 안정을 보게 되더니, 의주의 옥졸(獄卒)이 중 강도(中 江島)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작취(斫취)하는데 내준 의주부윤 이시술(李時술)의 물금장(勿禁狀)이 저쪽 사람에게 잡혀 봉 성장이 전일에 월 채(越 採)한 자의 살인사건을 보고하지 않았다가 당한 문책에 감정을 품고 몹시 중대하게 허구 날조(虛構捏造)하여 부윤 이 시술이 장차 큰 화를 입게 되었었다. 현종이 꼭 구제하려고 국력 주선하라 하니 조정에 일대 소동이 벌어졌었고 공도 청나라 사신의 내왕길이 있을 적마다 이를 극구 해명하여 결국 무사하게 귀착은 되었으나, 공의 전일의 말을 새삼 기억하고 탄복했으며, 본 감영(監營)이 본래 요부 하기로 제도(諸道)에 으뜸이어서 천류고(泉流庫) 등에 재화가 산적했던 것을 창고를 관리하는 자에게 일임하여 혹은 대여, 혹은 도절당해 빈 문 부만을 쥐고 이던 것을 공이 문 부를 상고하면서 창고를 일일이 점검하여 모두 독촉해 징수하니 창고가 충만하게 되어 누차 청나라 사신의 요구에 수응(酬應)했어도 많은 재화를 남기게 되었다.
1663(현종4)년에 임기를 마치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 한성부(漢城府)의 좌. 우윤(左右 尹)으로 천 전하면서 부 총관(副 摠管)을 겸임하였고 이어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때 공의 동지와 제우(㑪友)가 거의 죽었거나 탈락돼 나갔고, 신진들과 친압하지 않아서 고립무원(孤立無援)한 처지에 있었는데 지평(持平) 박세당(朴세堂)이 요대(僚臺 동료의 대관)가 없는 틈을 타서 도승지의 경질을 청했던 것인데, 처음에는 심각한 언사는 없었다. 그러다가 임금의 준엄한 비지(批旨)가 내리자, 기어코 이를 관철하려고 다시 계사를 올려 망칙한 비방을 퍼부은 것을 집의(執義) 김만기(金萬基). 지평(持平) 이단 하(李端夏)가 박세당이 시원(試院)에 들어가고 없으므로 예에 따라 연계(連啓)하면서 욕된 소리를 제거해 버렸다. 사태는 더욱 발전하여 박은 다시 피혐(避嫌)하는 계사를 통해 김. 이 두 사람에게로 화살을 돌리면서 공에게는 가일층 욕설을 퍼부었고, 대각(臺閣)에 큰 풍파를 야기 하는데 까지 비약했다. 그러나 임금은 끝내 대간의 청을 윤허하지 않았으나 사세가 행공(行公)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여 특명으로 일단 체직(遞職)케 했던 것이다. 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말하기를, “속으로 반성해 부드러울 것이 없으니 터무니 없는 말들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하고 금양(禁養 지금의 안양(安養))의 선산아래로 나가 잇다가 다시 한강(漢江)의 상류의 강산을 두루 유람하다가 양근(陽根)사골에 땅을 정하고 여생을 보내려고 마음먹고 두 번 한성부(漢城府)의 임명을 받고도 나가지 않았다. 1664년에 중국으로 가는 사절의 부사(府使)에 선발 임명되어 재삼 극력 사퇴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으니. “이는 왕역(徃役)이다. 신자(臣子)의 분의(分義)로 끝 가지 사 피할 수 없는 일이다”하고 드디어 숙배(肅拜)하고 갔는데 왕복한 연도(沿道)에서와 사관(使館)에 있을 때 상사(上使) 기천(沂川)홍명하(洪命夏)와 수창(酬唱)한 시(詩)와 일기(日記)가 책을 이루었으며, 북경으로부터 돌아오매 그 행장에서 중국의 물건이란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이해 여름에 계속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고, 곧이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을 받고 두 번 소(疏)를 올려 그 해면(解免)을 비었으나 종시 불허하여 부득이 부임했다. 이듬해 여름에 만기로 갈려 돌아오니, 이때 임금이 왕대비(王大妃)를 모시고 온양온천(溫陽溫泉)에 거동하려는데 행궁(行宮)이 협착하고 누추하다 해서 개축론이 있자 모두들 [임 아무개가 아니면 이 임무를 수행할 사람이 없다]하여 다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되니, 경상감사로부터 돌아 온지 불과 수개월 이었다. 하직할 대 인견(引見)하는 자리에서 [되도록 간략히 하고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는 임금의 부탁을 받고, 정리 사(整理 使)에게 말하여 행궁의 도형(圖形)을 청해가지고 가서 도형대로 건축하고 한 사람의 역군일지라도 빠짐없이 임금(賃金)을 지불하여 백성들에게 큰 환심을 샀으며, 임금을 받는데도 불편 없이 하면서도 하나도 폐단을 끼치지 않아 백성들이 임금의 행차가 가가이 와있는 것을 의식 못할 정도였다 한다. 임금이 행 궁에서 인견하고 깊이 노고를 치사하고, 환궁한 뒤에 자급(資級)의 승진을 명하니 장령(掌令) 이광적(李光迪)이 승진시킨 자급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면서 민원(民怨)을 많이 샀다고가지주장했다. 그러나 임금은 끝내 대관의 청을 거부 했으며 뒤에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온양행행 영후도(溫陽行幸令後圖) 서문(序文)에 공이 인화(人和)를 얻은 사실을 극구 찬양하여 대관의 중상이었음이 스스로 박혀졌다.
1666(현종7)년 겨울에 만기로 갈려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 이듬해 봄에 다시 공조참판(工曹參判) 겸 부 총관(副 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장차 양근땅 강 위로 들어가려다가 병에 걸려 윤 4월 5일에 서울 정릉동(貞陵洞) 집에서 향년 63세로 세상을 마쳤다. 나라에서 법에 따라 부의(賻儀)와 치제(致祭)를 내렸고 유명을 좇아 처음에는 충청도 덕산(德山) 가양동(伽양洞)에 장사하니, 공이 감사로 있을 당시 예정해 놓은 곳이였다. 그 뒤 1699(숙종25)년에 다시 지금의 충북 보은(報恩) 속리산(俗離山)남쪽기슭 만세 동(萬世 洞) 계좌(癸坐)에 자리를 얻어 동년 2월 25일에 이장(移葬)했다.
실(室)은 상산 김씨(商山 金氏), 관찰사(觀察使) 상(尙)의 딸로 4남 2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좌(座)는 문과에 올라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고, 둘째 아들 방(埅)도 역시 문과에 올라 벼슬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으며, 셋째 아들 승(陞)은 요사(夭死)했고, 넷째 아들 동(董)은 진사(進士)이다. 공이 밖으로 혹은 안으로 남긴 행적과 일화 몇 가지를 추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당산강사(棠山江舍)란 한강(漢江)연변에 좋은 자리를 골라서 아버지 당 호(棠 湖)공 연(兖)이 설계 건축한 별장이 있었으니 그의 헌 호(軒 號)를 당 호라 함은 이 까닭이었다. 서울이 아주 가깝고 건물도 화려한데다가 경치가 좋기로 이름이 높았다. 형제가 가산을 나눌 때에 아버지의 유명에 따라 공에게 돌아왔던 것인데 공의 매부 한 사람이 “만일 당산가사를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삼공(三公 정승벼슬을 말함)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공이 이 말을 듣는 즉시 양도해 주고 조금도 애석해하는 빛이 없어 모든 친척들을 탄복케한 바 있고, 황해감사로 나가서는 풍천(豊川)과 송화(松禾) 두 고을에 있는 어사 공(御使 公)과 부원군 공(府院君 公)등 선대묘소에 사초(莎草)와 봉분(封墳)을 다시 하고 글자가 떨어져 나간 표석(表石)의 돌을 바꾸고 음기(陰記)를 지어 고쳐 세웠으며, 부절(符節)을 가지고 묘 정(墓庭)에 올라가서는 한 도내에 거주하는 자손 수백 명을 집합, 사서(士庶)의 구별 없이 모두 인솔하고 친히 글을 지어 제사하고 이내 술을 거르고 소를 잡아 음복 회(飮福 會)를 배설, 마음껏 취한 뒤에 파하였다. 그날 거행한 제사의 제문(祭文)이 지금도 전해온다.
그리고 공은 [동성(同姓)은 백대지친(百代之親)인지라 혹 귀천(貴賤)이 다르다 해도 한 자손으로서 교만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부당하다]하고, 알현(謁見)을 구해 오는 자 있으면 누구나 맞아들여 정성껏 접대하여 종 중의 미담(美談)으로 전해오며, 묘 전(墓 田 위토)도 봉한 바 있다. 또 사람됨이 항직(伉直)하고 시원스러웠으며 주략(籌略)에 능하였는데 반드시 근절(近切)한 것보다는 먼 장래를 내다보고 군국대계(軍國大計)를 가슴속에 미리 헤아려서 계획 진행하니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여유작작했다. 행정 함에 있어서는 법을 엄수하고 대체(大體)를 잡아 나가려고 노력 했으며 너그럽고 후한 기풍으로 통솔하였는데, 어떤 성색(聲色)을 가하지 않아도 자연 위엄이 있어 이서(吏胥)들이 그 앞에 가기만 하면 몸을 떨었고, 관하의 수령들도 모두 경외(敬畏)하여 명령만 내리면 곧 받들어 행하곤 하였는데, 지방장관으로 5개 도를 역임, 그 치적은 언제나 8도에 으뜸을 차지했었다. 그럴수록 그럴 수록 수령들의 치적에 대한 포 폄(褒 貶)에 가장 신중을 기하고 그의 배경의 우 무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더욱이 장리(贓吏 부정공무원)에겐 가차없이 엄중한 처단을 내린 바 있어 만년에 공에 대한 중상과 모략이 이에 연유했다는 것이다. 특히 신명(神明)한 결옥(決獄)으로 이름이 높아 영남(嶺 南)같은 곳은 인구가 많고, 폭원이 넓어서 소송사건이 답지하였는데 공의 부임함을 듣고는 궁벽한 곳의 영세민들이 억울한 사건을 호소해 오는 자가 앞을 다투어 모여왔고, 기타 군민(軍民)의 소장(訴狀)과 원 군수)의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밀려와 때로는 수만 건(數萬 件)에 달하기도 했는데, 15.6명의 서리들이 앞에 나열 해 서서 소장을 읽어대서 마치 뭇 개구리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공은 읽는 되로 제사(題辭)를 불러 붓을 멈출 사이가 없이 좌수 우응(左酬右應)하여 일사천리로 판결을 내려도 뒤에 조정에서의 오결사고(誤決査考)에서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상감사로서 수많은 옥사의 다스림을 잘했다는 것으로 김시양(金時讓). 구봉서(具鳳瑞)가 가장 이름을 날렸는데, 구봉서는 능히 같이 읽는 것을 아울러 들으면서 진행하긴 했으나 간혹 제사에 착오가 있었으며, 김시양은 제사의 착오는 없었으나 아울러 들으면서 처결하는데 약간 불급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공은 능히 이를 겸비해서 모두들 탄복했다는 것이다.
경상감사를 재임(再任)했을 때, 부임벽두에 어느 소장(訴狀)을 들고 그 사람을 불러 힐문 하기를,”네가 소송한 것은 내가 전번에 이도(道)를 안찰(按察)했을 당시 이미 처결한 것인 것, 네 어찌 감히 또 왔단 말이냐”하니 그 사람이 즉시 굴복했는데 이는 8년 전에 수 많은 소송가운데 있었던 미 쇄(微 瑣)한 사건이었다. 성품이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자질(子姪)들을 위해 벼슬을 구한적이 없었다. 만년에 세상의 도의가 날로 무너져 감을 보고 더욱 전사(田舍)로 돌아갈 뜻을 굳히고 스스로 호를 만한(晩閑)이라고, 또 금시(今是))라고 당명(黨名)을 지으니 이는 도 연명(陶 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말을 취해 쓴 것이다. 소년시절부터 스승 사계(沙溪)의 [이심위사(以心爲辭)]의 교훈을 받고, 이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평생을 하루같이 받들어 지키면서 말하기를, “이는 나의 삼자 부(三字 符)이다”고 했다. 또 성현의 글을 읽으면 매양 차기(箚記)가 있어 자득(自得)한 것이 많았고, 또 옛사람의 언행(言行)을 발취하여 항상 체험을 가하곤 했다. 사한(詞翰)에도 재분이 높아 17세에 지은 우의전(羽衣傳). 인부(印賦) 등의 고평에서 계곡(谿谷) 장유(張維)는 기운(氣韻)과 격조(格調)가 기발 웅대하고 말이 방을 소리처럼 청신(淸新)하다]하였고, 공의 과체시(科體詩)을 본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은 평하기를, “구법(句法)이 고건(高健)한 것으로 보아 과구(科臼)에 물든 것 같지 않다. 이런 솜씨로 과장(科場)에 나간다면 주사(主司)자가 어찌 괄목하지 안 겠는가. 다만 시만 보고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그 풍모도 반드시 그 시와 같은 것이다”했다. 이들은 당시 예원(藝苑)의 맹주(盟主)였다.
교우관계로는 당시의 많은 명류(名流)와 교계(交契)가 깊었으나 특히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과는 동기(同氣)와 다름없는 사이로 어느 날 동춘이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두환*痘患 마마)를 치르지 않고 있다. 자네는 복인(福人)이라 내 아들이 자네 집에서 두환을 치를 것 같으면 별 탈이 없을 것 같다”하고, 드디어 어린 그 아들 광식(光栻)을 보냈는데 공의 내외가 아들같이 사랑하며 1년을 지내고 두환을 치른 뒤에 간 바 있어 광식이 커서 숙부 모처럼 대하였고 공의 부인의 상사에 와서 몹시 애통해 하면서 대소람(大小斂)을 모두 몸소 들고 했다. 뒤에 이조판서 겸 양 관 대제학 도총관(吏曹判書兼兩館大提學 都摠管)에 추증(追贈)되었다. 저술로는 미간 본(未刊 本)문집(文集) 2권과 연행일기(燕行日記)2권이 가장(家藏)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그밖에 실천 록(實踐錄). 필화(筆花), 박문록(博文錄). 문장 박선(文章博選). 분류 운(分類 韻) 등 7종 63권의 편저(編著)가 있다고 공의 중 자(仲 子)가 지은 행장에 기록되어 있으나 3백여 년을 내려 오면서 병화(兵禍)와 실화(失火)로 인해 편집한 것은 거의 유실되어 없고 연행일기와 문집습유(文集拾遺)만이 전해지고 있다.
(領議政 李宣顯撰 平安道 觀察使 任公 神道碑 銘 仲子 任埅撰 先考今是堂府君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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